미국 건국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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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18세기 후반 미국 독립과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제1차 및 제2차 대륙회의, 미국 독립 선언, 연합 규약, 미국 헌법 제정 등 일련의 과정을 주도했다. 주요 인물로는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벤저민 프랭클린 등이 있으며, 이들은 정치, 군사, 외교, 사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체로 백인, 영국계 혈통, 높은 교육 수준, 그리고 광범위한 정치 경험을 공유했으며, 종교, 노예제, 그리고 건국 이후의 유산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보였다. 이들의 업적은 미국의 정치, 사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미국 사회의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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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건국의 아버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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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미국의 건국 아버지 |
정의 | 1770년대에서 1780년대 사이에 미국 독립 전쟁을 주도하고, 새로운 국가의 정부 형태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 |
주요 인물 | |
핵심 인물 | 존 애덤스 새뮤얼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 알렉산더 해밀턴 존 핸콕 존 제이 토머스 제퍼슨 패트릭 헨리 리처드 헨리 리 로버트 리빙스턴 제임스 매디슨 조지 메이슨 로버트 모리스 페이턴 랜돌프 로저 셔먼 조지 워싱턴 |
역할 | |
독립 선언 | 미국 독립 선언 서명 |
헌법 제정 | 미국 헌법 제정 |
국가 건설 | 새로운 국가의 정부 형태 수립 |
시대적 배경 | |
주요 사건 | 스탬프 법 (1765년) 보스턴 차 사건 참을 수 없는 법 미국 독립 전쟁 리 결의안 미국 독립 선언 파리 조약 (1783년) 미국 헌법 미국 권리 장전 |
활동 시기 | |
시기 | 1760년대 ~ 1820년대 |
추가 정보 | |
관련 문서 | 미국 독립 선언 서명자 연합 규약 서명자 미국 헌법 서명자 |
2. 배경
1774년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회의가 간단하게 열렸다. 여기에는 조지 워싱턴, 패트릭 헨리, 존 애덤스와 같은 13개 식민지 중 12개 식민지 의회에서 선발된 56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다른 저명한 대표단으로는 매사추세츠에서 온 새뮤얼 애덤스와 펜실베이니아에서 온 존 디킨슨 그리고 뉴욕에서 온 존 제이가 있었다. 대륙회에서는 영국 왕실에 탄원서를 보낼 것을 확정하는 외에도 영국 본국을 대상으로 보이콧과 실력행사를 관리할 대륙협의체를 구성했다.[138][139][140]
1775년 5월 10일 사실 상 제1차 대륙회의의 연장인 제2차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이전에 참석했던 56명의 대표단 중 대다수가 제2차 대륙회의에도 참석했다. 새로 참여한 저명한 인물로는 벤실베이니아에서 온 벤저민 프랭클린과 로버트 모리스 그리고 메사추세츠에서 온 존 핸콕이 있었다. 이어 2주 이내에 페이튼 랜돌프가 의회 의장을 맡기 위해 버지니아에 소환되었고, 버지니아 대표단은 토머스 제퍼슨으로 교체되었다. 핸콕은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제2차 대륙회는 미국 독립 선언을 채택하였다.[153][154]
새롭게 건국된 미합중국은 영국 의회를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미국인들은 연합규약을 채택했다. 이것은 일원제로 구성된 정부체를 구성하는 선언문이었다. 13개 식민지에서의 비준은 제2차 대륙회의에 연합회의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였고, 그것은 1781년에서 1789년간 활동을 했다. 이후 1789년 필라델피아에서 제헌회의가 개최되었다.
비록 연합규약을 개정하기 위해 회의는 소집되었지만, 제임스 매디슨이나 알렉산더 해밀턴과 같은 그 지지자들의 당초 의도는 부적절하게 존재하는 정부를 수정하기 보다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대표단은 조지 워싱턴을 연합회의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그 회의의 결과로 미국 헌법이 탄생하였다.
1760년대 중반, 의회는 1763년에 끝난 10년간의 프랑스-인디언 전쟁으로 인한 영국의 부채를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126][127] 인지 조례와 타운젠드 법(Townshend Acts)에 대한 반대는 식민지들을 공동의 대의명분으로 묶었다.[128] 인지 조례는 철회되었지만, 타운젠드 법에 따라 차에 대한 세금은 유지되었고, 1773년 의회가 차 조례를 채택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었다. 새로운 차 세금은 더 엄격한 세관 단속과 함께 식민지 전체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특히 매사추세츠에서 그랬다.[129]
1773년 12월 16일, 모호크 인디언으로 변장한 150명의 식민지 주민들이 보스턴의 배에 올라 342개의 차 상자를 도시의 항구에 쏟아 부었는데, 이는 보스턴 차 사건으로 알려진 항의였다.[130][131]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와 보스턴 통신 위원회가 주도한 이 시위는 영국 당국에 의해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다.[132] 이에 대응하여 의회는 강압적 또는 가혹 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보스턴의 항구를 폐쇄하고 식민지를 영국 정부의 직접 통제하에 두는 일련의 징벌적 법률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식민지 전역에서 불안을 야기했는데, 이는 의회가 권한을 넘어섰고 1600년대부터 아메리카에서 존재해 온 자치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129]
가혹 법에 대응하기 위해, 13개 식민지 중 12개 식민지는 필라델피아에서 대표단을 보내 회의를 열기로 합의했으며, 조지아는 원주민 부족과의 분쟁에서 영국의 군사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참여를 거부했다.[133] 1774년 훨씬 이전부터 미국 연합의 개념이 고려되었지만, 항상 영국 제국의 권위에 복종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1774년까지 초기 미국 출판인 및 인쇄업자의 식민지 신문에 주로 익명의 작가들이 쓴 편지들은 모든 미국인을 대표하는 "의회"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영국 당국과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될 것이었다.[134]
대륙 회의는 식민지가 영국과 직면한 일련의 긴급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이 회의의 대표들은 식민주의자들 사이에서 가장 지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들로 여겨졌다. 참을 수 없는 법 이후, 완고한 영국 왕과 의회의 손에 의해, 식민지는 임의적인 의회 권위에 완전히 복종하거나 통일된 무장 저항에 의존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135][136] 새로운 의회는 대규모 전쟁을 선포하는 지휘 기구로 기능했으며 무력 투쟁 동안 제공한 지침에 의해서만 승인되었다. 그 권한은 불분명하게 남아 있었고, 대표자 중 몇 명은 사건이 곧 "국가들 사이의 새로운 권력"을 확립하는 정책을 결정하게 할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의회는 적절한 헌법이 발전하기 전에 정부에 대한 많은 실험을 수행했다.[137]
2. 1. 제1차 대륙회의 (1774년)
1774년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렸다.[138] 조지 워싱턴, 패트릭 헨리, 존 애덤스와 같은 13개 식민지 중 12개 식민지 의회에서 선발된 56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139][140] 다른 대표로는 새뮤얼 애덤스, 존 디킨슨, 존 제이가 있었다.[139] 버지니아의 페이턴 랜돌프가 만장일치로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39][140]회의 초기에는 대표 문제로 해산될 위기에 처했으나, 패트릭 헨리는 식민지 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버지니아인, 펜실베이니아인, 뉴요커, 뉴잉글랜드인의 차이는 더 이상 없다. 나는 버지니아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다!"라고 주장했다.[141]
대표단은 서퍽 결의안을 논의하였는데, 이 결의안은 영국 상품에 대한 무역 금지, 식민지 전체의 민병대 창설 등을 요구했다.[142] 9월 17일, 회의는 매사추세츠 식민지 주민들이 전쟁을 유발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145][146]
이후 국왕에게 보내는 청원과 선언 및 결의안을 승인했다.[147] 리처드 헨리 리가 제안한 이 선언에는 대륙 협회로 알려진 무역 보이콧도 포함되었다.[148] 통신 위원회는 보이콧 시행 권한을 부여받았다.[149]
식민지 장관인 윌리엄 레그, 다트머스 백작은 새 회의가 불법이라고 비난했다.[150][151] 토머스 게이지 중장은 매사추세츠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1775년 1월, 게이지는 민병대 탄약 압수를 명령받았다.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에서 영국군과 민병대가 충돌하면서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152]
2. 2. 제2차 대륙회의 (1775년 ~ 1781년)
1774년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렸고, 1775년 5월 10일에는 제1차 대륙회의의 연장인 제2차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153] 제2차 대륙회의에는 조지 워싱턴, 패트릭 헨리, 존 애덤스, 새뮤얼 애덤스, 존 디킨슨, 존 제이, 벤저민 프랭클린, 로버트 모리스, 존 핸콕, 토머스 제퍼슨 등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참석했다.[154] 회의는 렉싱턴 콩코드 전투 이후 3주가 채 안 되어 펜실베이니아 주 의사당에서 소집되었다.[153]제2차 대륙회의는 식민지 방위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착수했다.[157] 대륙군을 창설하고,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161][162] 벙커힐에서 영국군과 충돌하기도 했다.[163] 이러한 군사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회의는 올리브 가지 청원을 통해 영국과의 화해를 모색했다.[164] 그러나 조지 3세는 청원을 거부하고 식민지를 반역으로 선언했다.[167][168] 제2차 대륙회의는 미국 독립 선언을 채택하였고, 연합규약을 통해 일원제 정부를 구성했다. 이후 연합회의는 1781년부터 1789년까지 활동했다.
3. 미국 독립 선언 (1776년)
제2차 대륙 회의와 그 다섯 위원회의 후원 아래[169], 토머스 제퍼슨은 독립 선언서를 초안했다. 이 선언서는 1776년 6월 28일에 위원회에 의해 의회에 제출되었고,[170] 많은 토론과 문서 편집을 거쳐 1776년 7월 2일[171][172] 의회는 리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이 결의안은 연합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음을 선언했다. 이틀 후인 7월 4일, 독립 선언서가 채택되었다.[173] 독립 선언서에 처음 등장한 "미국"이라는 이름은 1776년 9월 9일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174]
이 중요한 문서를 신속하게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제2차 대륙 회의 의장 존 핸콕은 ''펜실베이니아 패킷''의 편집자이자 인쇄업자인 존 던랩에게 독립 선언서의 브로드사이드 사본 200부를 인쇄하도록 위임했으며, 이는 던랩 브로드사이드로 알려지게 되었다. 인쇄는 독립 선언서가 채택된 다음 날 시작되었다. 이 사본들은 13개 식민지/주 전체에 배포되었으며, 조지 워싱턴 장군과 그의 뉴욕 주둔 병사들에게 읽어보라는 지시와 함께 사본이 보내졌다. 또한 영국 및 유럽의 다른 지역에도 사본이 보내졌다.[175][176][170]
미국 독립 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로부터 생명, 자유, 행복 추구와 같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 정부는 국민의 동의에 의해 권력을 얻으며,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 정부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국민은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권리가 있다.
- 영국 왕은 식민지에 대한 폭정을 휘둘렀으며, 식민지 주민들의 권리를 침해했다.
- 식민지는 더 이상 영국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독립된 국가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것이다.
미국 독립 선언은 미국 독립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미국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미국 헌법 제정의 기초가 되었으며, 전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독립 선언에 서명한 대표자들은 다음과 같다.[169][170][171][172][173][174][175][176]
- 존 애덤스
- 새뮤얼 애덤스
- 조사이어 버틀렛
- 카터 브랙턴
- 찰스 캐럴
- 새뮤얼 체이스
- 에이브러햄 클라크
- 조지 클라이머
- 윌리엄 엘러리
- 윌리엄 플로이드
- 벤저민 프랭클린
- 엘브리지 게리
- 버턴 그윈넷
- 라이먼 홀
- 존 핸콕
- 벤저민 해리슨
- 존 하트
- 조지프 퓨즈
- 토머스 헤이워드 주니어
- 윌리엄 후퍼
- 스티븐 홉킨스
- 프랜시스 홉킨스
- 새뮤얼 헌팅턴
- 토머스 제퍼슨
- 프랜시스 라이트풋 리
- 리처드 헨리 리
- 프랜시스 루이스
- 필립 리빙스턴
- 토머스 린치 주니어
- 토머스 매퀸
- 아서 미들
- 루이스 모리스
- 로버트 모리스
- 존 모턴
- 토머스 넬슨 주니어
- 윌리엄 파커
- 존 펜
- 로버트 트리트 페인
- 조지 리드
- 시저 로드니
- 조지 로스
- 벤저민 러시
- 에드워드 러틀리지
- 로저 셔먼
- 제임스 스미스
- 리처드 스톡턴
- 토머스 스톤
- 조지 테일러
- 매슈 손턴
- 조지 월턴
- 윌리엄 휘플 주니어
- 윌리엄 윌리엄스
- 제임스 윌슨
- 존 위더스푼
- 올리버 월컷
- 알렉산더 해밀턴
- 조지 와이스
4. 연합 규약 (1781년)
5. 미국 헌법 제정 (1787년)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헌법 제정 회의는 연합 규약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새로운 정부 형태를 수립하기 위해 개최되었다.[193][194] 연합 규약 하에서는 연합 회의 의회는 세금 징수, 상업 규제, 국채 지급, 외교 관계 수행, 서부 영토 관리 등에 대한 권한이 없었다.[189][190][191]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등 주요 지도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강력한 중앙 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192]
미국 헌법 제정 회의는 1787년 5월 14일부터 9월 17일까지 펜실베이니아 주 의사당에서 개최되었다.[195] 회의에는 18세기 미국 지도층의 단면을 보여주는 55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196] 이들 대다수는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했으며, 각 주에서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대표단의 70% 이상(40명의 대표)이 회의가 제안되었을 때 의회에서 활동했다.[196][191]
조지 워싱턴은 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197][198] 회의는 비밀 유지 규칙을 채택하여 대표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하였다.[199][200][201]
에드먼드 랜돌프가 제출한 버지니아 계획은 양원제 입법부, 단일 행정부, 사법부로 구성된 3부 정부를 제안했다.[202][203][204] 하원은 인구 비례로 선출되고, 상원은 주 의회가 지명한 대표자들 중에서 하원이 선출하는 방식이었다.[205][206]
윌리엄 패터슨은 뉴저지 계획을 통해 단원제 입법부와 주에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는 수정안을 제시했다.[208] 이 계획은 국가 정부가 무역과 상업을 규제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209][210][211]
대표자들은 단일 행정부와 입법 대표 방식에 대해 논의했으며, 큰 주들은 인구 비례 대표를, 작은 주들은 각 주 동등 대표를 주장하며 대립했다.[214][215][216]
로저 셔먼이 제시한 코네티컷 타협은 하원은 인구 비례, 상원은 각 주 동등 대표로 구성하는 절충안이었다.[218][219][220] 이 타협안은 5개 주 대 4개 주로 간신히 통과되었다.[221][222]
일부 대표들은 회의가 권한을 넘어섰다고 항의하거나, 권리 장전 부재에 우려를 표하며 회의를 떠났다.[225][226][227][228][229] 제임스 매디슨 조차도 상원의 동등 대표와 의회에 주 법률 거부권이 없는 점에 불만을 가졌다.[230]
최종 헌법 초안은 1787년 9월 17일에 승인되었으며, 11개 주가 찬성했다.[223] 로드아일랜드는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고,[231][232] 에드먼드 랜돌프, 조지 메이슨, 엘브리지 게리는 서명을 거부했다.[233][224]
미국 헌법은 13개 주 중 9개 주 이상의 비준을 필요로 했다.[234] 델라웨어가 최초로 비준했으며,[236] 이후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조지아 등이 비준했다.[237] 그러나 권리 장전 누락에 대한 반대가 있었고, 특히 버지니아에서는 조지 메이슨과 패트릭 헨리가 반대를 주도했다.[238][239][240] 연방주의자들은 헌법 채택 후 수정 조항 추가를 약속하며 반대파를 설득했다.[241]
1788년 6월 21일, 뉴햄프셔가 아홉 번째로 비준하여 헌법이 발효되었다.[242][243] 버지니아와 뉴욕이 차례로 비준했고, 노스캐롤라이나와 로드아일랜드는 뒤늦게 헌법을 승인했다.[238][244][245]
미국 헌법은 1789년 3월 4일에 공식 발효되었고,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246][247][248] 미국 권리 장전은 1791년 12월 15일에 비준되었다.[249]
미국 헌법 제정 회의 당시 대표들은 비밀 유지를 맹세했기 때문에, 제임스 매디슨의 기록은 1836년 그가 사망한 후에야 출판되었다.[250]
6. 건국의 아버지들의 경력
미국 헌법 제정 회의에 참석한 55명의 대의원은 18세기 미국 지도자의 한 단면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교양이 있고, 속한 사회에서 지도적인 지위에 있으며, 역사에 이미 입증된 인물이 많았다. 사실상의 모든 사람이 미국 독립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29명은 대륙군에 종군하여 대부분 지휘관 직에 있었다. 미국 독립 선언과 헌법에 서명한 사람의 경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사 기록이 있다.[444]
미국 대통령 중 처음 다섯 명은 미국 독립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건국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그리고 제임스 먼로가 그들이다. 그들은 각각 대륙 회의의 대표를 역임했다.[260]
건국의 아버지들은 18세기 후반 영국 식민지 정치 지도부의 상류층을 대표했다.[261][262] 그들은 모두 자신의 공동체와 식민지에서 공공 문제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려는 지도자들이었다.[263]
독립 선언서, 연합 규약 및 미국 헌법 서명자들 중 거의 모든 사람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및 웨일스를 포함하여 영국계 혈통의 토착민이었다.[264][265] 거의 절반이 변호사였고, 나머지는 주로 사업가와 농장주였다.[266][267][268] 건국 아버지들의 평균 연령은 43세였다.[269] 1706년에 태어난 벤자민 프랭클린이 가장 나이가 많았고, 1750년 이후에 태어나 20대였던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270][271][272]
대부분의 정보는 독립 선언서, 연합 규약 및 헌법과 관련된 서명자/대표자들에게 국한된다.
건국의 아버지의 3분의 1 이상이 미국 식민지에서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했으며, 다른 건국자들은 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해외 대학을 다녔다. 나머지 건국자들은 홈스쿨링, 개인 교습, 도제 제도를 거치거나 독학했다.
다음은 식민지 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에 설립된 9개의 대학 중 6곳을 졸업한 건국의 아버지 목록이다.
-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토머스 제퍼슨[289], 존 블레어 주니어[290], 제임스 맥클러그[291], 제임스 프랜시스 머서[292], 에드먼드 랜돌프[293]
- 컬럼비아 대학교(킹스 칼리지): 존 제이[294], 로버트 R. 리빙스턴[295], 거버너 모리스[296]
- 하버드 대학교(하버드 칼리지): 존 애덤스[297], 새뮤얼 애덤스[298], 프랜시스 데이나[299], 윌리엄 엘러리[300], 엘브리지 게리[301], 존 핸콕[302], 윌리엄 후퍼[303], 윌리엄 새뮤얼 존슨 (예일도 해당),[304] 루퍼스 킹[305], 제임스 러블[306], 로버트 트리트 페인[307], 케일럽 스트롱[308], 조지프 워렌[309], 존 웬트워스 주니어[310], 윌리엄 윌리엄스[311]
- 프린스턴 대학교(뉴저지 칼리지):[312] 거닝 베드포드 주니어[313], 윌리엄 리처드슨 데이비[314], 조나단 데이턴[315], 올리버 엘스워스[316], 조지프 휴스[317], 윌리엄 하우스턴[318], 리처드 허슨[319], 제임스 매디슨[320], 알렉산더 마틴[321], 루터 마틴[322], 윌리엄 패터슨[323], 조지프 리드[324], 벤자민 러시[325], 너새니얼 스커더[326], 조나단 베이아드 스미스[327], 리처드 스톡턴[328]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필라델피아 칼리지): 프랜시스 홉킨슨[329], 헨리 마찬트[330], 토머스 미플린[331], 윌리엄 파카[332], 휴 윌리엄슨[333]
- 예일 대학교(예일 칼리지): 앤드루 아담스[334], 에이브러햄 볼드윈[335], 라이먼 홀[336], 타이터스 호스머[337], 재러드 잉거솔[338], 윌리엄 새뮤얼 존슨 (하버드도 해당),[304] 필립 리빙스턴[339], 윌리엄 리빙스턴[340], 루이스 모리스[341], 올리버 울콧[342]
알렉산더 해밀턴[287]과 제임스 먼로[288]와 같은 몇몇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학(각각 컬럼비아 대학교와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을 다녔지만 졸업하지는 못했다. 1760년대에 설립된 다른 세 개의 식민지 대학으로는 브라운 대학교(로드아일랜드 대학교), 다트머스 대학교, 럿거스 대학교(퀸스 칼리지)가 있다.
다음은 영국 교육 기관을 졸업한 건국의 아버지들이다.
- 이너 템플(Inner Temple): 런던에 있는 4개의 법학원(Inns of Court) 중 하나: 윌리엄 휴스턴,[349] 윌리엄 페이카(William Paca)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졸업자이기도 함)[343][332]
- 미들 템플(Middle Temple): 4개의 법학원 중 하나: 존 배니스터,[344] 존 블레어,[345] 존 디킨슨,[346] 토머스 헤이워드 주니어,[347] 토머스 린치 주니어(Thomas Lynch Jr.) (케임브리지 대학교 졸업자이기도 함),[347] 존 매튜스,[348] 찰스 코테스워스 핀크니,[349] 페이튼 랜돌프,[343][350] 존 룻리지[349]
- 케임브리지 대학교(University of Cambridge), 잉글랜드: 토머스 린치 주니어(Middle Temple 졸업자이기도 함),[351] 토머스 넬슨 주니어[352]
- 에든버러 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 스코틀랜드: 벤자민 러시,[353] 존 위더스푼[354]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백인이었으며, 3분의 2(55명 중 36명)는 미국 식민지 출신이었고, 19명은 대영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태어났다.
- 잉글랜드: 윌리엄 리처드슨 데이비, 윌리엄 듀어, 버튼 기네트, 로버트 모리스, 토머스 페인
- 아일랜드: 피어스 버틀러, 토머스 피츠시몬스, 제임스 맥헨리, 윌리엄 패터슨, 제임스 스미스, 조지 테일러, 찰스 톰슨, 매튜 손턴
- 스코틀랜드: 에드워드 텔페어, 제임스 윌슨, 존 위더스푼
- 웨일스: 프랜시스 루이스
- 서인도 제도: 알렉산더 해밀턴, 대니얼 로버도
미국 헌법 제정 회의에 참석한 55명의 대의원들은 18세기의 '''미국 지도자'''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그들 대부분은 교양 있고, 속한 사회에서 지도적인 지위에 있었으며, 국사에 대해 이미 실적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상 모든 사람이 독립 혁명에 관여했다. 적어도 29명은 대륙군에 종군했으며, 대부분이 지휘관의 직위에 있었다. 독립 선언과 헌법에 서명한 자들의 경력에 대한 조사 기록이 있다[436]。
==== 정치 ====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국가 및 주 차원에서 광범위한 정치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273][274] 1787년까지 4분의 3에 해당하는 41명이 대륙 회의의 일원이었다.[445] 55명 전원이 각자의 식민지 의회에서 경험을 쌓았고, 대부분은 지방 행정 단위의 장을 역임했다.[445]
토머스 미플린과 너새니얼 고햄은 대륙회의 의장을 역임했다.[445] 대륙회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리처드 바셋을 포함해 총 15명이었다.[445] 존 디킨슨, 벤저민 프랭클린, 존 랭던, 존 러틀리지는 주지사를 역임했다.[445] 8명이 미국독립선언과 헌법에 서명했고,[445] 6명이 연합규약과 헌법에 서명했다.[445] 로저 셔먼과 로버트 모리스는 세 문서 모두에 서명했다.[445]
독립 선언서와 연합 규약 서명자들은 제2차 대륙 회의의 구성원이었으며, 제헌 회의 대표의 5분의 4는 회의 기간 중 또는 회의 전에 의회에서 활동했다. 회의에 참석한 나머지 5분의 1은 그들을 임명한 주 의회 지도자들로 인정받았다.
몇몇 건국의 아버지들의 정치 경력은 다음과 같다.
- 존 애덤스는 브레인트리 시의회 의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하여 1765년 인지세법 위기 동안 주목을 받았다. 이후 매사추세츠 총회에 선출되었고, 1774년 대륙 회의에 선출되었다. 이후 미국의 초대 부통령(1789–1797)이자 제2대 대통령(1797–1801)이 되었다.[275][276]
- 존 디킨슨은 1770년대 펜실베이니아 의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제1차 및 제2차 대륙 회의의 일원으로서, 그는 조지 3세에게 두 건의 청원을 썼다. 독립에 반대했지만 민병대에서 장교로 복무했고 연합 규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1780년대에는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와 델라웨어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제헌 회의의 대표였다.[277]
- 벤저민 프랭클린은 1751년 펜실베이니아 의회에 선출되었고, 1757년 런던으로 파견되었다.[278] 1775년 영국에서 돌아온 후, 제2차 대륙 회의에 선출되었다. 1776년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후, 프랑스와 스웨덴의 공사로 임명되었고, 1783년 파리 조약 협상을 도왔다. 1785년부터 1788년까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였으며 제헌 회의의 대표였다.[279]
- 존 제이는 제1차 및 제2차 대륙 회의의 뉴욕 대표였으며, 1778년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782년, 파리 조약 협상을 도왔다. 페더럴리스트 논문 중 5편을 썼고, 헌법 채택 이후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다.[280] 스페인 공사[2][281][282]
- 토머스 제퍼슨은 제2차 대륙 회의(1775–1776)의 버지니아 대표였으며 독립 선언서의 주요 저자였다. 버지니아의 제2대 주지사로 선출(1779–1781)되었고 프랑스 공사로 재직(1785–1789)했다. 초대 국무장관(1790–1793), 제2대 부통령(1797–1801) 및 제3대 미국 대통령(1801–1809)을 역임했다.[283][284]
- 로버트 모리스는 펜실베이니아 의회의 일원이었으며 펜실베이니아 안전 위원회 의장이었다. 비밀 통신 위원회와 제2차 대륙 회의의 일원이기도 했다. 연합 규약 하에서 재무 장관으로 복무했으며 제헌 회의의 대표로 활동했다.[285]
- 로저 셔먼은 제1차 및 제2차 대륙 회의, 코네티컷 하원에서 활동했고 치안 판사를 역임했다. 제헌 회의 대표로 참석했고, 헌법 비준 후 미국 하원과 상원에서 활동했다. 대륙 협회, 독립 선언서, 연합 규약 및 미국 헌법 등 네 가지 주요 건국 문서에 모두 서명한 유일한 건국자였다.[286]
==== 직업 ====
1787년의 대의원은 폭넓게, 중상급으로 간주되는 직업에 종사하며, 많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고 있었다. 대의원의 직업은 왕당파의 경우와 극단적인 차이는 없었지만, 그 직업에 있어서는 젊은 분이었다.[446] 35명이 변호사이며 법률에 대한 지식을 살렸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직업을 생계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판사 출신의 사람도 있었다.[446]
회의 시간에 13명이 상인이었다. 6명이 대규모의 땅을 가지고 있었고, 11명은 대규모 증권을 투자했다. 12명은 노예 노동에 의한 플랜테이션 또는 대규모 농장의 소유자 또는 경영자였다. 2명이 소규모 농부였고, 9명은 지방 관청에서 상당한 비율로 수익을 얻고 있었다. 3명은 실제 경제 활동에서 은퇴했고, 2명은 과학자이고, 다른 활동도 했다. 2명은 의사이며, 1명은 대학의 학장이었다. 1명은 개신교 목사였다. 또한 3명 또는 다른 어떤 신학을 배우고 있었지만 교회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광범위한 직업에 종사했지만, 대부분은 세 가지 전문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창립자 중 약 절반은 변호사였고, 6분의 1은 플랜테이션 소유주/농부였으며, 또 다른 6분의 1은 상인/사업가였고, 나머지는 기타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
10명의 창립자는 의사였다.[374][335][375][291][376][325][326][377][309][333] 존 위더스푼은 유일한 목사였지만, 라이먼 홀은 의사가 되기 전에 목사였다.[378][335] 조지 워싱턴은 버지니아 연대의 대령이 되기 전에는 토지 측량사였다.[379] 벤자민 프랭클린은 42세에 은퇴하여 과학 연구에 집중한 다음 정치와 외교에 헌신하여, 대륙 회의 의원, 초대 우체국장, 영국, 프랑스, 스웨덴 주재 공사,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등을 역임했다.[380][381][382][383]
==== 가족 및 재정 ====
1787년 대의원 몇몇은 부자였다. 식민지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의 대부분은 왕당파이며, 영국에 돌아갔다.[447] 다른 사람 대부분은 매우 또는 적당히 재정 기반이 있었다. 자산의 측면에서는 대체로 왕당파보다 열등했다.[438] 조지 워싱턴과 로버트 모리스는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자리 매김했다.[447] 4명은 상당한 자산가였고, 7명은 썩 좋은 재정 상태는 없었지만, 괜찮은 축에 들었다. 상당수 사람이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몇몇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를 한 사람들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18세기 후반 영국 식민지 정치 지도부의 상류층을 대표했다.[261][262] 그들은 모두 자신의 공동체와 식민지에서 공공 문제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려는 지도자들이었다.[263]
독립 선언서, 연합 규약 및 미국 헌법 서명자들 중 거의 모든 사람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및 웨일스를 포함하여 영국계 혈통의 토착민이었다.[264][265] 거의 절반이 변호사였고, 나머지는 주로 사업가와 농장주였다.[266][267][268] 건국 아버지들의 평균 연령은 43세였다.[269] 1706년에 태어난 벤자민 프랭클린이 가장 나이가 많았고, 1750년 이후에 태어나 20대였던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270][271][272]
==== 기타 ====
1787년 대의원 대다수는 13개 식민지 태생이었다.[261][262] 4명이 아일랜드 출신, 2명이 잉글랜드 출신, 스코틀랜드 및 서인도 제도 출신이 각 1명이었다. 많은 사람이 여러 식민지를 거친 경험이 있었으며, 해외 유학 또는 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강한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440] 프랭클린처럼 대부분 독학으로 또는 직업을 가지며 배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정교사에게 배우거나 전문 학교에서 배운 사람도 있었다. 절반가량은 식민지 또는 영국의 대학을 나왔다. 의학박사 학위를 가진 자, 신학을 수행한 사람도 있었다. 몇몇 변호사는 런던의 법률 학교에서 공부했지만, 대부분은 미국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여 일하고 있었다.[263]
독립 선언서, 연합 규약 및 미국 헌법 서명자들 중 거의 모든 사람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및 웨일스를 포함하여 영국계 혈통의 토착민이었다.[264][265] 거의 절반이 변호사였고, 나머지는 주로 사업가와 농장주였다.[266][267][268] 건국 아버지들의 평균 연령은 43세였다.[269] 1706년에 태어난 벤자민 프랭클린이 가장 나이가 많았고, 1750년 이후에 태어나 20대였던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270][271][272]
==== 수명 ====
1787년 대의원들의 평균 수명은 67세였다.[439] 윌리엄 새뮤얼 존슨이 92세로 가장 오래 살았다.[270] 80세 이상 장수한 사람은 4명이었다. 15명 내지 16명이 70대까지 살았고, 20명 내지 21명이 60대까지 살았다. 8명은 50대까지 살았고, 5명은 40대까지 살았다. 2명은 결투로 인해 사망했다.[439]
대의원 대다수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로저 셔먼은 2명의 아내에게서 15명의 자녀를 낳아 가장 큰 가족을 이루었다. 최소 9명은 여러 번 결혼했고, 4명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261][262][263]
==== 종교 ====
1787년 미국 헌법 제정 회의 대의원 중 일부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 신자 3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개신교였다.[384] 개신교 가운데 28명은 미국 성공회(영국 성공회 또는 미국 성공회) 신자였고, 8명은 장로교회, 7명은 조합교회 주의자, 두 사람은 루터 교회, 두 사람은 감리교도였다.[384]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유명한 건국의 아버지 중 일부는 반성직자 기독교주의였다.[385][386] 제퍼슨은 기존의 종교에 대한 반발과 교권 반대주의를 주장했으며, 자신의 성경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패트릭 헨리처럼 전통적인 종교의 강한 지지자도 있었다. 토머스 페인과 같은 이는 이신론을 신봉하였다. 역사가 그레그 L. 프레이저는 주요 건국자들(존 애덤스, 제퍼슨, 프랭클린, 윌슨, 모리스, 매디슨, 해밀턴, 워싱턴)이 기독교인도 이신론자도 아닌, 혼합된 "유신론적 합리주의"의 지지자들이라고 주장한다.[387] 많은 건국자들은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를 피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L. 홈즈는 편지, 정부 문서, 그리고 간접적인 기록에서 얻은 증거를 사용하여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밝혀냈다.[50]
건국의 아버지들의 다양한 신앙 형태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종교를 호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강연이나 문서에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민의 윤리성을 형성할 때, 법의 준수를 확보할 때 (워싱턴), 사람의 악을 조사할 때 (프랭클린), 미국과 같은 자유로운 정부를 보호할 때 (애덤스) 종교의 역할이다. 교회와 정치의 분리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항상 강조하던 것이었다. "미국 의회는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라는 글이 1797년 트리폴리 조약에 있으며, 이 문서는 의회에서 별로 논의도되지 않고 비준되어, 건국의 아버지들의 의도를 연상시키는 것이 되어 있다.
종교는 아니지만, 상당한 수의 사람이 프리메이슨이었다.
6. 1. 정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국가 및 주 차원에서 광범위한 정치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273][274] 1787년까지 4분의 3에 해당하는 41명이 대륙 회의의 일원이었다.[445] 55명 전원이 각자의 식민지 의회에서 경험을 쌓았고, 대부분은 지방 행정 단위의 장을 역임했다.[445]토머스 미플린과 너새니얼 고햄은 대륙회의 의장을 역임했다.[445] 대륙회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리처드 바셋을 포함해 총 15명이었다.[445] 존 디킨슨, 벤저민 프랭클린, 존 랭던, 존 러틀리지는 주지사를 역임했다.[445] 8명이 미국독립선언과 헌법에 서명했고,[445] 6명이 연합규약과 헌법에 서명했다.[445] 로저 셔먼과 로버트 모리스는 세 문서 모두에 서명했다.[445]
독립 선언서와 연합 규약 서명자들은 제2차 대륙 회의의 구성원이었으며, 제헌 회의 대표의 5분의 4는 회의 기간 중 또는 회의 전에 의회에서 활동했다. 회의에 참석한 나머지 5분의 1은 그들을 임명한 주 의회 지도자들로 인정받았다.
몇몇 건국의 아버지들의 정치 경력은 다음과 같다.
- 존 애덤스는 브레인트리 시의회 의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하여 1765년 인지세법 위기 동안 주목을 받았다. 이후 매사추세츠 총회에 선출되었고, 1774년 대륙 회의에 선출되었다. 이후 미국의 초대 부통령(1789–1797)이자 제2대 대통령(1797–1801)이 되었다.[275][276]
- 존 디킨슨은 1770년대 펜실베이니아 의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제1차 및 제2차 대륙 회의의 일원으로서, 그는 조지 3세에게 두 건의 청원을 썼다. 독립에 반대했지만 민병대에서 장교로 복무했고 연합 규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1780년대에는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와 델라웨어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제헌 회의의 대표였다.[277]
- 벤저민 프랭클린은 1751년 펜실베이니아 의회에 선출되었고, 1757년 런던으로 파견되었다.[278] 1775년 영국에서 돌아온 후, 제2차 대륙 회의에 선출되었다. 1776년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후, 프랑스와 스웨덴의 공사로 임명되었고, 1783년 파리 조약 협상을 도왔다. 1785년부터 1788년까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였으며 제헌 회의의 대표였다.[279]
- 존 제이는 제1차 및 제2차 대륙 회의의 뉴욕 대표였으며, 1778년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782년, 파리 조약 협상을 도왔다. 페더럴리스트 논문 중 5편을 썼고, 헌법 채택 이후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다.[280] 스페인 공사[2][281][282]
- 토머스 제퍼슨은 제2차 대륙 회의(1775–1776)의 버지니아 대표였으며 독립 선언서의 주요 저자였다. 버지니아의 제2대 주지사로 선출(1779–1781)되었고 프랑스 공사로 재직(1785–1789)했다. 초대 국무장관(1790–1793), 제2대 부통령(1797–1801) 및 제3대 미국 대통령(1801–1809)을 역임했다.[283][284]
- 로버트 모리스는 펜실베이니아 의회의 일원이었으며 펜실베이니아 안전 위원회 의장이었다. 비밀 통신 위원회와 제2차 대륙 회의의 일원이기도 했다. 연합 규약 하에서 재무 장관으로 복무했으며 제헌 회의의 대표로 활동했다.[285]
- 로저 셔먼은 제1차 및 제2차 대륙 회의, 코네티컷 하원에서 활동했고 치안 판사를 역임했다. 제헌 회의 대표로 참석했고, 헌법 비준 후 미국 하원과 상원에서 활동했다. 대륙 협회, 독립 선언서, 연합 규약 및 미국 헌법 등 네 가지 주요 건국 문서에 모두 서명한 유일한 건국자였다.[286]
6. 2. 직업
1787년의 대의원은 폭넓게, 중상급으로 간주되는 직업에 종사하며, 많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고 있었다. 대의원의 직업은 왕당파의 경우와 극단적인 차이는 없었지만, 그 직업에 있어서는 젊은 분이었다.[446] 35명이 변호사이며 법률에 대한 지식을 살렸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직업을 생계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판사 출신의 사람도 있었다.[446]회의 시간에 13명이 상인이었다. 6명이 대규모의 땅을 가지고 있었고, 11명은 대규모 증권을 투자했다. 12명은 노예 노동에 의한 플랜테이션 또는 대규모 농장의 소유자 또는 경영자였다. 2명이 소규모 농부였고, 9명은 지방 관청에서 상당한 비율로 수익을 얻고 있었다. 3명은 실제 경제 활동에서 은퇴했고, 2명은 과학자이고, 다른 활동도 했다. 2명은 의사이며, 1명은 대학의 학장이었다. 1명은 개신교 목사였다. 또한 3명 또는 다른 어떤 신학을 배우고 있었지만 교회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광범위한 직업에 종사했지만, 대부분은 세 가지 전문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창립자 중 약 절반은 변호사였고, 6분의 1은 플랜테이션 소유주/농부였으며, 또 다른 6분의 1은 상인/사업가였고, 나머지는 기타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
10명의 창립자는 의사였다.[374][335][375][291][376][325][326][377][309][333] 존 위더스푼은 유일한 목사였지만, 라이먼 홀은 의사가 되기 전에 목사였다.[378][335] 조지 워싱턴은 버지니아 연대의 대령이 되기 전에는 토지 측량사였다.[379] 벤자민 프랭클린은 42세에 은퇴하여 과학 연구에 집중한 다음 정치와 외교에 헌신하여, 대륙 회의 의원, 초대 우체국장, 영국, 프랑스, 스웨덴 주재 공사,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등을 역임했다.[380][381][382][383]
6. 3. 가족 및 재정
1787년 대의원 몇몇은 부자였다. 식민지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의 대부분은 왕당파이며, 영국에 돌아갔다.[447] 다른 사람 대부분은 매우 또는 적당히 재정 기반이 있었다. 자산의 측면에서는 대체로 왕당파보다 열등했다.[438] 조지 워싱턴과 로버트 모리스는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자리 매김했다.[447] 4명은 상당한 자산가였고, 7명은 썩 좋은 재정 상태는 없었지만, 괜찮은 축에 들었다. 상당수 사람이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몇몇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를 한 사람들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18세기 후반 영국 식민지 정치 지도부의 상류층을 대표했다.[261][262] 그들은 모두 자신의 공동체와 식민지에서 공공 문제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려는 지도자들이었다.[263]독립 선언서, 연합 규약 및 미국 헌법 서명자들 중 거의 모든 사람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및 웨일스를 포함하여 영국계 혈통의 토착민이었다.[264][265] 거의 절반이 변호사였고, 나머지는 주로 사업가와 농장주였다.[266][267][268] 건국 아버지들의 평균 연령은 43세였다.[269] 1706년에 태어난 벤자민 프랭클린이 가장 나이가 많았고, 1750년 이후에 태어나 20대였던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270][271][272]
6. 4. 기타
1787년 대의원 대다수는 13개 식민지 태생이었다.[261][262] 4명이 아일랜드 출신, 2명이 잉글랜드 출신, 스코틀랜드 및 서인도 제도 출신이 각 1명이었다. 많은 사람이 여러 식민지를 거친 경험이 있었으며, 해외 유학 또는 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건국의 아버지들은 강한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440] 프랭클린처럼 대부분 독학으로 또는 직업을 가지며 배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정교사에게 배우거나 전문 학교에서 배운 사람도 있었다. 절반가량은 식민지 또는 영국의 대학을 나왔다. 의학박사 학위를 가진 자, 신학을 수행한 사람도 있었다. 몇몇 변호사는 런던의 법률 학교에서 공부했지만, 대부분은 미국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여 일하고 있었다.[263]
독립 선언서, 연합 규약 및 미국 헌법 서명자들 중 거의 모든 사람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및 웨일스를 포함하여 영국계 혈통의 토착민이었다.[264][265] 거의 절반이 변호사였고, 나머지는 주로 사업가와 농장주였다.[266][267][268] 건국 아버지들의 평균 연령은 43세였다.[269] 1706년에 태어난 벤자민 프랭클린이 가장 나이가 많았고, 1750년 이후에 태어나 20대였던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270][271][272]
6. 5. 수명
1787년 대의원들의 평균 수명은 67세였다.[439] 윌리엄 새뮤얼 존슨이 92세로 가장 오래 살았다.[270] 80세 이상 장수한 사람은 4명이었다. 15명 내지 16명이 70대까지 살았고, 20명 내지 21명이 60대까지 살았다. 8명은 50대까지 살았고, 5명은 40대까지 살았다. 2명은 결투로 인해 사망했다.[439]
대의원 대다수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로저 셔먼은 2명의 아내에게서 15명의 자녀를 낳아 가장 큰 가족을 이루었다. 최소 9명은 여러 번 결혼했고, 4명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261][262][263]
6. 6. 종교
1787년 미국 헌법 제정 회의 대의원 중 일부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 신자 3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개신교였다.[384] 개신교 가운데 28명은 미국 성공회(영국 성공회 또는 미국 성공회) 신자였고, 8명은 장로교회, 7명은 조합교회 주의자, 두 사람은 루터 교회, 두 사람은 감리교도였다.[384]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유명한 건국의 아버지 중 일부는 반성직자 기독교주의였다.[385][386] 제퍼슨은 기존의 종교에 대한 반발과 교권 반대주의를 주장했으며, 자신의 성경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패트릭 헨리처럼 전통적인 종교의 강한 지지자도 있었다. 토머스 페인과 같은 이는 이신론을 신봉하였다. 역사가 그레그 L. 프레이저는 주요 건국자들(존 애덤스, 제퍼슨, 프랭클린, 윌슨, 모리스, 매디슨, 해밀턴, 워싱턴)이 기독교인도 이신론자도 아닌, 혼합된 "유신론적 합리주의"의 지지자들이라고 주장한다.[387] 많은 건국자들은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를 피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L. 홈즈는 편지, 정부 문서, 그리고 간접적인 기록에서 얻은 증거를 사용하여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밝혀냈다.[50]
건국의 아버지들의 다양한 신앙 형태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종교를 호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강연이나 문서에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민의 윤리성을 형성할 때, 법의 준수를 확보할 때 (워싱턴), 사람의 악을 조사할 때 (프랭클린), 미국과 같은 자유로운 정부를 보호할 때 (애덤스) 종교의 역할이다. 교회와 정치의 분리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항상 강조하던 것이었다. "미국 의회는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라는 글이 1797년 트리폴리 조약에 있으며, 이 문서는 의회에서 별로 논의도되지 않고 비준되어, 건국의 아버지들의 의도를 연상시키는 것이 되어 있다.
종교는 아니지만, 상당한 수의 사람이 프리메이슨이었다.
7. 건국의 아버지로 간주되는 기타 인물
이선 앨런은 버몬트 공화국 건국에 참여했다.[85][86] 리처드 브랜드는 미국 독립 전쟁 이전 식민지의 사상 형성에 기여했다.[23][24][25][26] 조지 클린턴은 제4대 미국 부통령을 역임했다.[86]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연설로 유명하다.[52] 존 제이는 파리 강화 조약의 초안 작성에 기여했다.[8] 헨리 리는 대륙군 기병 장교로 활약했다.[113] 로버트 리빙스턴은 독립 선언을 기초한 5인 중 한사람이다.[57][58] 존 마셜은 제4대 대법원장을 역임했다.[59][60][61][62] 제임스 먼로는 대륙회의 대의원을 지냈으며, 제5대 미국 대통령이자 공화국 세대의 마지막 인물이다.[63][64][65] 토머스 페인은 《상식》(''Common Sense'')의 저자로, 만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신헌법 초안 작성도 도왔다.[59][68][69][70][71] 페이턴 랜돌프는 초대 대륙회의 의장을 역임했다.[73] 찰스 톰슨은 미국 국무총리라고도 불린 대륙회의 전 기간의 서기관을 역임했다.[75]
8. 건국의 어머니
역사가들은 "건국의 어머니"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국가의 초기 발전에 여성들이 수행한 역할을 인식하게 되었다.[81][82]
이러한 존경을 받는 여성들 중에는 존 애덤스의 아내이자, 신뢰할 수 있는 조언자이며, 두 번째 영부인이자, 여섯 번째 미국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의 어머니였던 애비게일 애덤스가 있다. 그녀는 남편에게 "여성들을 기억하고, 조상들보다 더 관대하고 호의적으로 대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고, 우리에게 목소리나 대표성이 없는 법에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유명하게 촉구했다.[86][118][83]
미국 독립 전쟁 동안의 시인, 극작가, 그리고 팜플렛 제작자였던 머시 오티스 워런도 건국의 어머니로 불린다.[59][84]
최근, 역사학자들은 신생 국가를 지탱한 여성들의 역할을 연구해 왔다. 정치적인 지위에는 여성이 없었지만, 애비게일 애덤스나 머시 오티스 워런과 같은 예도 있었고, 건국의 어머니는 공화제의 가치를 높이고 국가의 가치 일부가 되는, 기록되지 않은 전통을 만들어냈다[443]。
9. 건국 이후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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